박종천 님은 한국과 실리콘밸리를 오가며 30년 동안 개발자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목표를 달성하고 문제를 바라보는 기준, GPAM(Goal, Plan, Action, Measure) 원칙을 만드셨고요. 최근에는 저서인 ⟪개발자로 살아남기⟫를 통해 30년 커리어패스 인사이트를 공개했습니다.
주니어 개발자에서 시작해 시니어, 팀장, 리드에 이르기까지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여정은 어땠을까요? 10월 COMMIT을 마친 어느 날 종천 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Q. 언제부터 개발을 시작하셨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그때 전국에서 제1회 퍼스널 컴퓨터 경진대회가 열렸는데, 학교에서 3달 동안 컴퓨터 학원을 보내줄 테니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컴퓨터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회에서도 괜찮은 성적을 냈어요. 재미가 생겨서 중·고등학교 때도 쭉 이어서 했습니다.
원래도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것처럼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하니 만들 수 있는 게 무한해진 거죠. 원하는 걸 마음껏 만들 수 있는 게 좋아서 컴퓨터를 계속했어요.
본격적으로 개발자가 되고 나서는 제가 만든 소프트웨어를 누군가 쓰는 게 기뻤습니다. 특히 한글과컴퓨터에서 아래 한글을 개발할 때는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다 보니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제가 만든 걸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게 하고 싶어서 블리자드, 넥슨을 거치며 사용자 규모를 계속 늘려갔죠.
Q. 처음으로 혼자 만들었던 것도 기억나세요?
게임이었어요. ‘스페이스 인베이더’ 같은 슈팅 게임을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100원에 팔다가 엄청 혼났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에는 컴퓨터에 저장 장치가 없어서 컴퓨터를 끄면 다 날아갔었습니다. 플로피 디스크, 하드 디스크도 없었죠. 컴퓨터를 켜면 최대한 빠르게 게임을 만들고 해보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게임을 만드는 시간을 줄이려면 타이핑 연습을 열심히 해야 했어요.
Q. 종천 님의 주니어 시절도 궁금한데요.
주로 선배가 만들어 둔 기능을 유지 보수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선배 문화가 강해서 누가 저를 성장시켜 주는 건 아니었어요.
그렇게 일하다 미국에 가니 기초가 너무 약하더라고요. 눈앞에 일을 처리하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큰 그림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총을 주고 과녁을 맞히라는 지시가 주어지면, 정확히 그것만 했죠. 총의 종류는 무엇이고, 어떤 총알이 들어 있는지 모른 채 목표에만 집중했습니다. 좀 더 여유를 갖고 큰 그림을 보면서 개발하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Q.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이하 블리자드)로 이직하면서 만드는 제품이 완전히 달라졌죠. 왜 게임 회사로 이직을 결심하셨나요?
개발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싶었어요. 아래 한글이 그랬습니다. 한글과컴퓨터에서 아래 한글을 만들면서 굉장히 뿌듯했어요.
미국에 가면서 무엇을 만들면 좋을지 고민했는데 인터넷 소프트웨어가 눈에 들어와 보이스 이메일 솔루션을 만들었어요. 다음에는 모바일 소프트웨어에 관심이 생겨 팜(Palm) OS와 포켓(Pocket) PC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었습니다.
생산성 소프트웨어, 인터넷 소프트웨어, 그리고 모바일 소프트웨어를 거친 다음 선택한 건 엔터테인먼트. 게임이었어요. 그래서 블리자드에 지원했습니다. 다시 이직할 시점이 됐을 때는 플랫폼 쪽 일을 더 하고 싶어 넥슨으로 갔고, 플랫폼을 하다 보니 데이터와 머신러닝에 관심이 생겨 삼성전자에서 일했습니다. 지금은 머신러닝에 집중하고 싶어 몰로코에 있고요.
지금까지 다닌 회사들은 모두 입사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게 늘 있었고, 그곳에서 원하는 만큼 역량을 발휘할 때까지 일했죠. 저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흐름이 있고, 흐름대로 분야를 옮겨 다니며 일하는 게 재밌었습니다.
Q. 흐름을 보는 눈이 남다르시네요.
한 분야에서 성공하는 게 목표가 아닙니다. 그 분야를 경험하면서 이해하고 싶었던 거죠. 낚시에 비유하면 손맛을 보는 게 목표지, 물고기를 많이 잡아서 부자가 되고 싶진 않았던 거예요. 직장 생활을 즐겁게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Q. 블리자드에서는 어떤 게임을 만드셨어요?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2, 워크래프트 3를 유지 보수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이후에는 계정, 배포, 결제, 소셜 등 플랫폼 쪽 일을 많이 했어요. 게임 회사라고 게임만 만드는 건 아니거든요.
메모리 매니지먼트 라이브러리, 스레드 라이브러리 등 라이브러리 관리도 오래 했습니다. 그러다 ‘배틀넷’이라는 플랫폼을 키우기도 하고, 모바일 게임 시장이 커지면서 팀을 옮겨 ‘하스스톤’이라는 게임도 만들었습니다.
Q. 미국의 개발 문화는 한국과 많이 다른가요?
확실히 미국은 소프트웨어 업계가 우리나라보다 오래된 만큼 업무 프로세스가 좋았습니다. 가장 와닿았던 건 개발만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였어요. 협업을 비롯한 소프트 스킬이 훨씬 중요하더라고요.
제가 경험한 한국의 개발 문화는 1명의 천재와 나머지 분들이 힘을 모으는 느낌이었다면, 미국은 다같이 협력해서 일하는 문화에 가까웠습니다. 미국에서 일하면서 협업하는 방법을 많이 배웠어요. 한국을 자주 오가며 제가 배운 걸 강연을 통해 알리려고 노력했고요.
Q. 소프트 스킬, 정말 중요하죠.
제가 하는 강의는 대부분 개발자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모두를 타깃으로 강연하는 걸 좋아해요. 개발자도 인간이잖아요. 보통 개발자는 개발은 잘하는데 다른 걸 못해서 도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소프트 스킬이 그렇죠.
Q. 처음 팀장이 되셨을 때는 어떠셨어요?
지금도 훌륭한 관리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때는 더 엉망진창이었어요. 독선적이고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앞으로 달려 나가며 모든 밑그림을 그리면 뒤쫓아오는 팀원들이 빈칸을 채워주었죠. 능력이 뛰어나고 훌륭한 팀원들이었는데 큰 충돌 없이 따라와 줘서 고마워요.
팀장을 하면서 잘한 것도 있고, 잘못한 것도 있습니다. 그때는 충분한 피드백을 받지 못해서 더 어려웠어요. 무엇이든 성공했을 때보다 실패했을 때 배우는 게 많죠. 개발과 관리 모두 어설펐던 그때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고 있습니다.
Q. 요새는 어떻게 이끌고 계세요?
완전 반대죠. 회사가 돌아가려면 팀원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리소스는 저라고 생각해요. 리소스를 공급하거나, 돌덩이를 치우는 건 제가 합니다. 팀원들에게 유용한 도구가 되려고 해요.
저는 1명이고 팀원은 10명인데, 제가 10명의 일을 어떻게 다 하겠어요. 각자가 전력으로 달리면서 필요할 때 저를 쓰는 거죠. 팀원들이 못하는 일을 제가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위임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제가 리더십 코칭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인데, 리더는 주어지는 일을 다 하면 안 됩니다. 1/3은 하고, 1/3은 위임하고, 1/3은 안 해야 해요. 중요한데 나만 할 수 있는 일은 하되, 중요한데 남들도 할 수 있는 일은 위임합니다. 리더는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까요. 중요하지 않은 일까지 다 하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일을 많이 하는 게 잘하는 게 아니에요.
직장 생활하면서 철학이 하나 생겼는데, 중요하지만 아무도 안 하는 일을 제가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보통 눈앞에 보이는 일을 합니다. 남들보다 한 발 뒤에서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 비어 있는 곳이 보이거든요. 먼저 보고 구멍이 안 나게 메꿔서 잘 돌아가게 만드는 거죠.
Q. 같이 일하고 싶은 주니어나 동료는 어떤 유형인지 궁금해요.
질문을 많이 하는 개발자를 좋아합니다. 왜 하는지, 무엇을 만들 건지, 어떻게 만들 건지, 다른 걸 만들면 안 되는지 등을 계속 묻는 거예요. 질문을 하면 할수록 방향이 명확해집니다. 스스로 명확하게 이해해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고요.
Q. 인사이트는 주로 어디서 얻으세요?
책에서 얻습니다. 인문, 소설, 개발 방법론,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사업 관리, 성과 관리, 팀 관리 등 다양한 분야를 읽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건 한정적이잖아요. 책으로는 무궁무진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죠.
사람들과 책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아합니다. 여기서 얻은 인사이트는 강연에 활용하거나, 페이스북에 정리하기도 해요.
Q. 이제 막 팀장이 된 개발자에게
팀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세요. 팀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디로 가고 싶어하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본인 생각만 고집하지 마시고요.
Q. 성장하는 주니어 개발자에게
주니어라고 뒤에 있을 필요 없습니다. 어떤 말이든 편하게 하세요. 만약 아이디어를 제시했는데 구박한다면, 그 회사의 조직 문화가 잘못된 겁니다. 편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개선해 달라고 요청하시고요. 그래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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